진서 모용황전

 [진서] 권109 모용황(慕容?), 모용한(慕容翰), 양유(陽裕)  - 방현령(房玄齡,당)의「진서晉書」권109 재기9 : 모용황(慕容?), 모용한(慕容翰), 양유(陽裕) - 한자원문은 국편위 고대사료집성(저본은 중화서국 점교본)에서 인용하고 중화서국본의 교감기를 덧붙여서 풀었습니다. (교1, 교2…의 방식으로 적음) 분문내용과 관련되는「진서」의 다른 대목이나「자치통감」등 다른 책의 기사도 몇 개 추가했습니다.  - OO군 OO현의 지명 설명은 기본적으로 진서 지리지에 의하며 때로 후한서 군국지로 보충하고, 한자어 어휘 해설은 zdic漢典의 한어사전, 네이트 한자사전 등을 참고하며 해당 문맥에 따라 제임의로 기입했습니다. 그리고 원문에 干支가 나와있는 경우는 陳垣의「二十史朔閏表」에 따라 음력날짜를 적어넣었습니다.   [참고] 이때까지의 모용선비 계보  막호발莫護跋 ? 목연木延 ? ①섭귀涉歸 - ③모용외慕容? (재위 285-333 생몰 269-333) ? ④모용황慕容? (재위 333-348 생몰 297-348) - ②모용내慕容耐 (섭귀의 동생. 재위 283-285) (※ ‘재위’는 (왕호나 제호 등은 따지지 않고) 모용부의 수장으로서 집권했다는 뜻이고, 전연前燕의 실제 직계 계보는 (섭귀) ? 모용외 ? 모용황...의 순서. 그리고 재위년은 유년칭원법에 따른 기사 무시하고 실제 재위 기준으로 적음)     ○ 모용황(慕容?)   晉書 卷一百九 載記 第九 (진서 권109 재기 제9)   慕容?字元眞, ?第三子也. 龍顔版齒, 身長七尺八寸. 雄毅多權略, 尙經學, 善天文. ?爲遼東公, 立爲世子. 建武 (317-318)初, 拜爲冠軍將軍·左賢王, 封望平侯, 率衆征討, 累有功. 太寧 (323-325)末, 拜平北將軍, 進封朝鮮公. ?卒, 嗣位, 以平北將軍行平州刺史, 督攝部內. 尋而宇文乞得龜爲其別部逸豆歸所逐, 奔死於外, ?率騎討之, 逸豆歸懼而請和, 遂築楡陰·安晉二城而還.   모용황(慕容?)은...

사악 잔악무도했던 사마의 중달

사악 잔악무도했던 사마의 중달  // 선제는 내심 꺼리는 바가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고, 시기심이 있고 임기응변이 많았다. 위무제(조조)는 선제에게 웅대하고 호방한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에게 낭고상(狼顧相)이 있음을 듣고는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그를 불러 오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게 하니 얼굴은 곧바로 뒤를 향하는데 몸은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세 마리 말이 한 구유(槽 -조씨의 조曹를 상징)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고는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래서 태자 조비(曹丕)에게 이르길,  “사마의(司馬懿)는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필시 너희 집안일에 관여할 것이다.” 라 하였다. 태자가 평소 선제와 친하여 늘 서로 비호했는데 이 때문에 총행을 잃게 되었다. 이에 선제는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이르러 이를 모두 직접 챙기니 이로 말미암아 위무제가 마침내 그에 관해 안심하게 되었다.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를 평정하자 대거 살륙을 행했다. 조상을 주살할 때는 그의 일파들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자매(姑姊妹-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죽였고, 그 뒤 위나라의 정(鼎)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명제(明帝-동진東晉의 명제 사마소司馬紹) 때 왕도(王導)가 모시고 배석했다. 명제가 전세(前世-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선제가 창업(創業)을 시작한 일을 진술하고 더불어 문제(文帝-사마소) 말년의 고귀향공(高貴鄕公) 에 관한 일(사마소가 조모曹髦를 죽인 일)을 진술했다. 명제(明帝)가 얼굴을 상(床)에 묻으며 말했다,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晉)의 제업이 어찌 장원(長遠-길고 멂)하겠는가!”  그의 의심많고 잔인한 행적을 보면 대저 낭고(狼顧)라는 말에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_진서 선제기 

한항재기

 [[모용준재기]]에서 분할 ○ 한항(韓恒)   한항(韓恒)은 자(字)가 경산(景山)이고 관진(灌津)(※) 사람이다.   부친인 한묵(韓黙)은 학행(學行,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한항은 젊을때부터 능히 속문(屬文,글을 지음)하고 같은 군(郡)의 장재(張載)에게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기어 배움)하였는데, 장재가 그를 남다르게 여겨 ‘왕을 보좌할 재주’(王佐才)라고 말하였다. 신장은 8척 1촌에 경적(經籍)들을 두루 읽어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다.   (※ 아마도 진서 지리지에 나오는 기주 안평국 관진(觀津)현을 말하는 듯합니다.「위서」지형지에 따르면 ‘기주 무읍군(武邑郡) 관진(灌津)현’인데, 전한 때는 신도(信都)에 속하고 후한 및 진나라 때는 안평(安平)에 속했었다고 고증함.)   영가(永嘉: 진 회제 307-313년)의 난 때에 요동(遼東)으로 피난하였다가 모용외(慕容廆)가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자(崔毖)를 몰아낸 뒤에는 다시 창려(昌黎)로 옮겼다. (모용외가) 그를 불러서 만나보고는 가상히 여겨 참군사(參軍事)로 임명했다.   함화(咸 和: 동진 성제 326-334년) 연간에 송해(宋該) 등이 ‘모용외가 한쪽 구석에서 공을 세우고 왕실을 위해 근성(勤誠,부지런히 정성을 다함)하였는데 그 지위는 낮고 임무는 막중하여 화(華)와 이(夷)(한족과 비한족)를 진수하기에 충분치 않으니 의당 (건업에) 표문을 올려 대장군(大將軍), 연왕(燕王)의 호칭을 내리도록 청해야 한다,’라고 건의하였다. 모용외가 이를 접수하고는 뭇 신료들에게 명하여 널리 이를 의논하도록 하니 모두 송해의 건의대로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한항이 이를 반박하며 말했다,   “뭇호(胡)들이 빈틈을 타서 사람들이 해를 입으니 제하(諸夏,중국)가 쓸쓸해지고 다시 강기(綱紀,기강)에 없게 되었습니다. 명공(明公)(→모용외)께서 충무독성(忠 武篤誠,충성스럽고 용맹하고 돈독하고 성실함)하며 사직(社稷)을 위해 근심하며 부지런...

진서 선제기(사마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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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선제기(사마의전) // 선황제(宣皇帝)는 휘(諱)가 의(懿), 자(字)는 중달(仲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성은 사마(司馬) 씨다. 그의 선조는 제(帝) 고양(高陽)(전욱 고양씨)의 아들인 중려(重黎)로부터 나왔으며 중려는 즉 하관(夏官) 축융(祝融)이다.   ※ 사마천 [사기] <초세가>에 의하면 중려(重黎)는 전욱(顓頊) 고양(高陽)의 증손자인데, 제곡(帝嚳) 고신(高辛) 때에 화정(火正)으로 임명되어 천하를 밝혔으므로 축융(祝融)으로 불리었다 합니다.  참고로 [사기]의 설에 따른 삼황오제의 ‘오제’는 황제(黃帝) 헌원, 전욱 고양씨, 제곡 고신씨, 요, 순…입니다.   당(唐-요임금), 우(虞-순임금), 하(夏)나라, 상(商)나라 때를 거치며 대를 이어 그 직책을 세습했고,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하관(夏官)을 사마(司馬)로 바꾸었다. 그 뒤 정백휴보(程伯休父)가 주(周) 선왕(宣王) 때 서쪽 오랑캐를 평정하니 관족(官族)이 되어 사마를 씨(氏)로 삼았다.    초(楚), 한(漢) 사이에(진한 교체기) 사마앙(司馬卬)은 조나라 장수가 되어 제후들과 함께 진(秦)나라를 토벌했고, 진나라가 망하자 은왕(殷王)으로 세워져 하내에 도읍했다. 한나라가 그 땅에 군(郡)을 설치하니 자손들이 마침내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사마앙으로부터 8세(世-대) 뒤 정서장군 사마균(司馬鈞)을 낳으니 자(字)는 숙평(叔平)이다. 사마균이 예장태수 사마량(司馬量)을 낳으니 자는 공탁(公度)이다. 사마량이 영천태수 사마준(司馬儁)을 낳으니 자는 원이(元異)이다. 사마준이 경조윤 사마방(司馬防)을 낳으니 자는 건공(建公)이다. 선제(宣帝)는 즉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절조을 갖추고 총명하며 많은 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교(儒教)를 가슴에 간직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개연(慨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