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선제기(사마의전)

진서 선제기(사마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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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황제(宣皇帝)는 휘(諱)가 의(懿), 자(字)는 중달(仲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성은 사마(司馬) 씨다. 그의 선조는 제(帝) 고양(高陽)(전욱 고양씨)의 아들인 중려(重黎)로부터 나왔으며 중려는 즉 하관(夏官) 축융(祝融)이다.

 

※ 사마천 [사기] <초세가>에 의하면 중려(重黎)는 전욱(顓頊) 고양(高陽)의 증손자인데, 제곡(帝嚳) 고신(高辛) 때에 화정(火正)으로 임명되어 천하를 밝혔으므로 축융(祝融)으로 불리었다 합니다.  참고로 [사기]의 설에 따른 삼황오제의 ‘오제’는 황제(黃帝) 헌원, 전욱 고양씨, 제곡 고신씨, 요, 순…입니다.

 

당(唐-요임금), 우(虞-순임금), 하(夏)나라, 상(商)나라 때를 거치며 대를 이어 그 직책을 세습했고,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하관(夏官)을 사마(司馬)로 바꾸었다. 그 뒤 정백휴보(程伯休父)가 주(周) 선왕(宣王) 때 서쪽 오랑캐를 평정하니 관족(官族)이 되어 사마를 씨(氏)로 삼았다. 

 

초(楚), 한(漢) 사이에(진한 교체기) 사마앙(司馬卬)은 조나라 장수가 되어 제후들과 함께 진(秦)나라를 토벌했고, 진나라가 망하자 은왕(殷王)으로 세워져 하내에 도읍했다. 한나라가 그 땅에 군(郡)을 설치하니 자손들이 마침내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사마앙으로부터 8세(世-대) 뒤 정서장군 사마균(司馬鈞)을 낳으니 자(字)는 숙평(叔平)이다. 사마균이 예장태수 사마량(司馬量)을 낳으니 자는 공탁(公度)이다. 사마량이 영천태수 사마준(司馬儁)을 낳으니 자는 원이(元異)이다. 사마준이 경조윤 사마방(司馬防)을 낳으니 자는 건공(建公)이다. 선제(宣帝)는 즉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절조을 갖추고 총명하며 많은 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교(儒教)를 가슴에 간직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개연(慨然)해 하며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 

 

같은 군(郡) 사람인 남양태수 양준(楊俊)이 [1]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했는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기 전인 선제(宣帝)를 만나보고는 비상한 그릇이라 말했다.



[1] 본문 중 남양(南陽)은 각 본에서는 모두 남군(南郡)으로 적혀 있다. 전대흔이 이르길, 


“위지(魏志)(삼국지 권23 양준전)에서 양준이 남양태수가 되었다 하고 남군이 아니다.”


고 했다. 이제 이에 근거해 남군을 남양으로 고친다. 


 청하(淸河) 사람인 상서 최염은 선제의 형인 사마랑과 서로 친했는데 또한 사마랑에게 이르길,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


라고 하였다.


한나라 건안 6년(201년), 군(郡)에서 상계연으로 천거했다. 


당시 위무제(魏武帝-조조)는 사공이었는데 그에 관해 듣고는 선제를 벽소(辟召)하려 했다. 선제는 한나라의 명운이 바야흐로 쇠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씨(曹氏)에게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하니 관절통 때문에 기거할 수 없다며 이를 사양했다. 위무제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선제를 엿보게 했는데 선제는 꼿꼿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위무제가 승상이 되자 (※208년의 일) 다시 벽소해 문학연(文學掾)으로 삼고는 명을 받들어 떠나는 자(行者)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만약 다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곧바로 잡아 가두도록 하라.” 


선제가 두려워하며 그 직에 취임했다. 그리하여 선제로 하여금 늘 태자(太子)와 함께 교제하게 하였고, 황문시랑으로 올렸다가 의랑(議郞), 승상 동조속으로 전임시키고 뒤이어 주부(主簿)로 전임시켰다.

 

장로(張魯) 정벌에 종군했을 때 위무제에게 말했다. (215년의 일)

 

“유비(劉備)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유장(劉璋)을 붙잡아 촉인(蜀人)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는데 멀리서 강릉을 다투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만약 한중에서 위엄을 떨친다면 익주가 진동할 것이고 진병하여 임한다면 사세상 필시 와해될 것입니다. 이러한 형세에 의거한다면 공력(功力)을 이루기는 쉽습니다. 성인(聖人)은 천시를 거스르지 않고 또한 놓치지도 않습니다.” 

 

위무제가 이르길, 


“사람의 고통은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더니, 이미 농우를 얻었는데 또 다시 촉을 얻기를 바라는구나!”


라 하며 그 말에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손권 토벌에 종군하여 이를 격파했다. (※ 216년 겨울~217년 봄 사이의 유수구 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군이 돌아오자 손권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표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천명(天命)에 관해 진술했다. 위무제가 이르길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


라 하니 선제가 대답했다.

 

“한 나라의 운수가 거의 끝나 전하(殿下)께서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여 천자를 섬기고 있습니다. 손권이 신하를 칭한 것은 하늘과 사람의 뜻입니다. 우(虞), 하(夏), 은(殷), 주(周)가 겸양(謙讓)하지 않은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천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위국(魏國)이 세워진 뒤 태자 중서자(太子中庶子)로 승진했다. (※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 5월 ; 위왕 즉위는 216년 5월 ; 조비가 태자가 된 것은 217년 10월)

 

늘 중대한 모의(大謀)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奇策)을 내어놓아 태자에게 중한 신임을 얻으니, 진군(陳群), 오질(吳質), 주삭(朱鑠)과 함께 4우(四友)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가 되자 위무제에게 말했다, 

 

“옛날 기자(箕子)가 모책을 진술하며 이르길 먹을 것이 그 으뜸이라 했습니다. 지금 천하에 농사짓지 않는 자가 대략 20여 만 명에 이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방책이 아닙니다. 비록 융갑을 벗진 않더라도(or 비록 전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의당 스스로 농사지으며 둔수해야 합니다.” 

 

위무제가 이를 받아들이니 이로써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해 국용(國用)이 넉넉해졌다. 

 

선제가 또 이르길, 


"형주자사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고 했으나 위무제가 이를 살피지 않았다. 


촉장 관우(關羽)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 등 7군이 모두 패몰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당시 한나라 황제가 허창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위무제는 적이 가깝다 하여 하북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선제가 간언했다, 

 

“우금 등이 수몰당한 것은 나아가 싸우거나 물러나서 지키다 실책한 것이 아니며 국가 대계(大計)에 손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며 또한 회수(淮水), 면수(沔水) 인근의 백성들을 크게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손권, 유비가 겉으로는 친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이 할 바를 깨우쳐주어 그로 하여금 관우의 배후를 협공하거나 견제하게 하면 번(樊)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입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손권은 과연 장수 여몽을 서쪽으로 보내 공안을 기습하여 함락했고 관우는 마침내 여몽에게 붙잡혔다.

  

위무제는 형주의 남은 백성과 영천에서 둔전하던 자들이 남쪽 도적(南寇-오나라)에 핍근(逼近)하다 하여 [2] 이들을 모두 옮기려 했다.


[2] 장증의 독사거정에서 이르길 “남구(南寇)는 오나라를 일컬으니 영천은 이에 가깝지 않다. 자치통감에는 漢川(한천)이라 적혀 있는데 이것이 옳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형초(荊楚) 사람들은 경박하여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관우가 이제 막 격파되어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은 몸을 숨기고 관망하고 있는데, 이제 착한 이들을 옮긴다면 그들의 뜻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떠난 자들이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그 후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위무제가 낙양에서 훙(薨)하자 (※ 조조의 죽음은 220년의 일) 조야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선제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임금의 관을 받들고 업(鄴)으로 돌아왔다.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즉위하자 하진정후에 봉해지고 승상 장사로 전임되었다. 때마침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樊), 양양(襄陽)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宛)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선제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우환을 끼치지는(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 양양)을 불태운 후 버렸는데 손권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위문제가 이를 후회했다.

  

위(魏)가 한나라의 선양을 받자 선제는 상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독군(督軍), 어사중승으로 전임되고 안국향후에 봉해졌다.

 

황초(黃初) 2년(221년), 독군(督軍)의 관직을 파하고 시중(侍中), 상서우복야로 올렸다.

 

황초 5년(224년), 천자가 남쪽을 순행해 오(吳)와의 국경지방에서 관병(觀兵)했다. 선제는 허창에 남아 진수했는데, 상향후로 고쳐 봉해지고 무군,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급사중, 녹상서사의 직이 더해졌다. 선제가 굳게 사양하자 천자가 말했다, 

 

“내가 제반 정무를 보며 밤낮으로 이어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소. 이는 그대에게 영예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오.”

 

황초 6년(225년), 천자가 다시 수군을 크게 일으켜 오(吳)를 정벌했는데, 다시 선제에게 명하길 머물며 지키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진무하고 밖으로는 군수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출발할 무렵 조서를 내렸다, 

 

“내가 후방의 일을 깊이 걱정하니 이 때문에 이를 경에게 맡기노라. 조참(曹參)이 비록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소하(蕭何)도 또한 중요하도다. 나로 하여금 서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게 하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천자가 광릉(廣陵)으로부터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며 선제에게 조서를 내렸다, 

 

“내가 동쪽에 있을 때는 무군(撫軍-관직으로 사람을 호칭하는 것으로 여기선 사마의를 가리킴)은 응당 서쪽의 일을 총괄하고, 내가 서쪽에 있을 때는 무군(撫軍)은 응당 동쪽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라.” 

 

이에 선제는 허창에 머물며 진수했다.

  

천자의 병이 깊어지자 선제는 조진, 진군 등과 더불어 숭화전의 남당(南堂)에서 보정(輔政)하라는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을 함께 받았다. 태자(太子)에게 조령을 내렸다, 


“이 세 명의 공들과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 

 

명제(明帝-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舞陽侯)로 고쳐 봉해졌다.

 

손권이 강하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 장패(張霸)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선제가 제군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 조비의 죽음과 손권의 공격은 모두 226년의 일)

 

태화 원년(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선제를 완(宛)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 - 형주, 예주의 2주 군무를 도독한다는 의미)의 직을 더했다. 

  

당초 촉장 맹달이 항복하자 위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매우 후대했었다. 선제는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누차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맹달을 영(領-겸직의 의미) 신성태수로 삼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했다. 그리하여 맹달은 오(吳)와 연결하고 촉(蜀)과 관계를 공고히 해 은밀히 중국(中國-위나라를 가리킴)을 도모하려 했다. 

 

촉상(蜀相) 제갈량은 그가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하는 것을 증오하고 또한 그가 화를 일으킬까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태수 신의(申儀)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제갈량은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자 하여 곽모(郭模)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신의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누설시켰다. 


※ 곽모와 신의의 대화 / [전략]戰略

 

맹달이 촉병 수백을 거느리고 위나라에 항복하자 위문제는 맹달을 신성태수로 삼았다. 


태화 원년,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에게 거짓 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태수 신의(申儀)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이고, 직성(織成)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소합향(蘇合香)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事已合)는 말입니다.” 


맹달은 그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거병하려 했다. 선제는 맹달이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효유했다. 

 

“장군이 지난 날 유비를 버리고 국가에 몸을 의탁하자 국가에서는 장군에게 변경의 중임을 맡겨 촉(蜀)을 도모하도록 했으니 가히 심관백일(心貫白日)이라 이를 만하오. 촉인(蜀人)들은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장군을 절치(切齒-이를 갈며 증오함)하지 않는 자가 없소. 제갈량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하고 싶었으나 오직 방법이 없어 고심할 뿐이었소. 곽모가 한 말이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누설되게 했겠소.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오.” 

 

맹달은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거병을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선제가 은밀히 군을 일으켜 공격했다. 제장들은 맹달이 두 적(賊)과 결탁되어 있으므로 의당 관망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은 신의(信義)가 없고 지금은 그들이 서로 의심하는 때이니, 응당 결단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속히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는 배도겸행(倍道兼行-이틀 길을 하루에 걸음, 신속히 행군함)하여 8일 만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오(吳)와 촉(蜀)이 각기 그들의 장수를 보내 서성(西城) 안교(安橋)와 목란새(木闌塞)로 향하게 하여 맹달을 구원하자 선제는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이를 막았다.

 

당초 맹달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완(宛)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내가 있는 곳과는 1,200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거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천자에게 표를 올리며 서로 왕복해야 하니 한 달은 걸릴 것인 즉, 내 성(城)은 이미 견고해지고 제군(諸軍)은 충분히 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은 깊고 험한 곳이라 사마공이 필시 직접 오지는 않을 것인데, 제장(諸將)들이 온다면 내가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하자 맹달이 또 제갈량에게 고했다,

 

“내가 거사한 지 8일 만에 군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니 어찌 그토록 신속(神速)할 수 있습니까!” 

 

상용성의 3면은 물에 의지했는데 맹달은 성 바깥에 목책(木柵)을 세워 스스로 굳게 방비했다. [3] 


[3] 하초의 진서음의에는 木柵(목책)이 水柵(수책)으로 적혀있다.


선제는 물을 건너 그 목책을 깨뜨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여덟 갈래 길로 성을 공격하여 16일 만에 맹달의 생질인 등현(鄧賢)과 장수 이보 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맹달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진려(振旅-군대를 거두어 개선함)하여 완(宛)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금하니 남쪽 사람들이 기뻐하며 귀부했다.

 

당초 신의(申儀)는 오랫동안 위흥(魏興)에 있으면서 변경지역에서 전횡하며 번번이 승제(承制-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 특히 임의로 관작을 봉배하는 것을 가리킴)하여 인장을 새겨 많이 가수(假授-황제 명의로써 대신해 수여함)하였었다. 맹달이 주살되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군수(郡守)들이 선제가 새로 승리했다 하여 예물을 바치며 축하하자 이를 모두 받았다. 선제는 사람을 시켜 신의에게 하례하러 직접 오도록 권유하고, 신의가 도착하자 승제(承制)한 정황을 심문하고는 그를 체포해 경사(京師)로 송환했다. 또한 맹달의 남은 무리 7천여 가(家)를 유주(幽州)로 옮겼다. 촉장 요정(姚靜), 정타(鄭他) 등이 그 부속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이 무렵 변군(邊郡)이 새로 귀부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호구가 많으니 위(魏) 조정에서 실태조사를 하려 했다. 선제를 경사(京師)로 오도록 하여 천자가 이 일에 관해 선제에게 자문을 구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적이 밀강(密網-촘촘한 그물, 엄격한 법률을 비유)으로 아랫사람들을 속박하니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그를 저버린 것입니다. 의당 너그러이 대강(大綱)으로 다스리면 자연히 안거하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또한 두 적을 의당 토벌해야 하는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선제가 대답했다. 

 

“오(吳)는 중국(中國)이 수전(水戰-물싸움)에 익숙지 못하다 여겨 감히 동관(東關-유수구 일대 관문)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릇 적을 공격할 때는 그들의 목구멍(喉)을 누르고 심장(心)을 찔러야 하는데, 하구(夏口), 동관(東關)이 바로 적의 심후(心喉)입니다. 만약 육군(陸軍)을 환성(皖城)으로 향하게 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한 뒤 수전군(水戰軍)을 하구(夏口)로 향하게 해 그들의 허점을 틈타 공격한다면 이는 신병(神兵)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격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 계획은 제갈량의 꾸준한 북벌로 인해 사마의의 생전엔 실제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천자가 이를 모두 옳게 여겼고, 다시 선제에게 명해 완(宛)에 머물도록 했다. 

  

태화 4년(230),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대도독, 가황월(假黃鉞)이 더해지고 조진과 함께 촉을 정벌했다. 선제는 서성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

  

이듬해(231년), 제갈량이 천수(天水)를 침범하고 기산에서 장군 가사(賈嗣), 위평(魏平)을 포위했다. 천자가 말했다, “서쪽에 일이 생기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만한 자가 없소.” 

 

그리고는 선제를 서쪽으로 가서 장안에 주둔케 하고 옹주, 양주 2개 주의 군무를 도독하게 하니(都督雍梁二州諸軍事-도독옹량이주제군사) [4] 거기장군 장합, 후장군 비요, 정촉호군 대릉, 옹주자사 곽회 등을 거느리고 제갈량을 공격했다. 


[4] <都督雍梁二州諸軍事> - 삼국지 위지 진류왕기(陳留王紀)에 의하면 양주는 경원 4년(263년, 촉 멸망 이후) 12월의 일로서 이때보다 30여 년 뒤의 일이다. 사마의가 2주를 도독하며 조진의 뒤를 이었고, 경초 3년(239년), 조엄이 사마의의 뒤를 이었는데, 위지 조진전, 조엄전에는 모두 雍涼(옹량)이라 적혀있다. 응당 위지에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都督雍梁二州諸軍事 → 都督雍涼二州諸軍事 로 보인다는 말 / 촉 멸망, 진 건국 이후 익주를 분할해 양주(梁州-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한중, 익주, 재동, 파군 등), 영주(寧州-운남, 건녕, 영창 등)가 설치됨.)

 

장합이 선제에게 권하길 군대를 나누어 옹(雍), 미(郿)에 주둔시켜 후진(後鎭)으로 삼자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전군(前軍)이 단독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 헤아린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군을 앞뒤로 나눈다면 이는 즉 초(楚)나라 삼군(三軍)이 경포(黥布)에게 격파당한 원인이었소.” (※) 

 

※ [사기] <경포열전>에 의하면, 한신, 팽월 등 공신들이 차례로 제거되는 데 위협을 느낀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회수를 건너 초나라(당시 하비에 도읍)에 쳐들어갑니다. 이때 초왕 유교가 이를 요격하고 요격군을 지휘하던 초나라 장수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서로 돕는 형세의 포진으로 대항했으나, 경포가 한 갈래 군을 깨뜨리자 나머지 두 군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초군이 궤멸됨.

 

그리고는 유미(隃麋)로 진군했다. 제갈량은 대군(大軍)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뭇 장수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수확했다. (※) 제장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자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 행군하면(兼行) 충분하오.” 

 

그리고는 갑옷을 벗고(卷甲) 밤낮으로 달려가니, 제갈량은 멀리서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1)  


※(1) 상규의 보리 / [삼국지] 명제기, 명제기 주 [위서]魏書

  

태화 5년=231년 가을 7월 병자일(6일), 제갈량이 퇴주하자 공이 있는 자들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봉작하고 관위를 더해주었다.[1]


[1] 위서 왈 – 당초 제갈량이 출군했을 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길, 제갈량군에 치중이 없어 군량이 필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어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상규 주변의 보리를 미리 베어 적의 식량을 없애자고 했는데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 앞뒤로 군사를 보내어 선왕(宣王-사마의)의 군을 늘려주었고 또한 보리를 지키도록 명했다. 선왕은 제갈량과 서로 맞서며 이 보리를 얻어 군량으로 삼았다.


선제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행군해 피로하나 이는 용병에 밝은 자라면 바라는 바요. 제갈량이 감히 위수(渭水)를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다루기 쉽소.” 


진군하여 한양(漢陽)에 주둔했는데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진을 치고 맞이했다.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병으로 유인했는데 군사들이 막 접전했을 때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해 기산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고 두텁게 포위했다. 


선제(宣帝)가 공격하여 그 포위한 것을 무너뜨리니 제갈량은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뒤쫓아 이를 깨트리니 사로잡거나[俘] 참수한[斬] 것이 만(萬)을 헤아렸다.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封邑)을 늘려주었다. 


이 무렵 군사(軍師) 두습(杜襲), 독군(督軍) 설제(薛悌)가 모두 말하길, 내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隴右-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祁山)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攻城)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野戰)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隴東)에서일 것이고 농서(隴西)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이에 표를 올려 기주(冀州)의 농부(農夫)를 옮겨 상규(上邽)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京兆),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감야(監冶-대장장이 감독)를 흥성하게 했다.

 

청룡(靑龍) 원년(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頃)의 농지에 물을 대니 나라가 충실해졌다.

 

청룡 2년(234), 제갈량이 다시 군사 10여 만을 이끌고 야곡(斜谷)을 나와 미(郿) 땅의 위수(渭水) 남쪽 평원에 영루를 세웠다. 천자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征蜀護軍) 진랑(秦朗)을 보내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선제의 절도(節度-지휘, 명령)를 받게 했다. 

 

제장(諸將)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선제가 말했다,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물을 뒤로 한 채 영루를 세웠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에 오른다면 제군(諸軍)이 무사(無事)할 것이오.” 

 

제갈량은 과연 오장원에 오르고 장차 북쪽으로 위수를 건너려 했는데, 선제는 장군 주당(周當)을 보내 양수(陽遂)에 주둔케 하여 적을 유인했다. 며칠 동안 제갈량이 움직이지 않으니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이 평원을 다투고 싶어 하면서도 양수(陽遂)로 향하지 않으니 이 뜻을 가히 알만하오.” 

 

장군 호준(胡遵),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보내 함께 양수(陽遂)를 방비하게 하니 적석(積石)에서 제갈량과 조우했다. 평원에서 싸웠는데 제갈량이 진격할 수 없자 오장원으로 되돌아갔다. 때마침 장성(長星-혜성)이 제갈량의 영루로 떨어지자 선제는 제갈량이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고 기병(奇兵-기습군)을 보내 제갈량의 후방을 기각(掎角)하여 오백여 급을 참수하고 생구(生口-포로) 천여 명을 붙잡았으며 항복한 자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외지에 거주하게 하며(僑軍) 멀리 침범했으니(遠寇) (※) (제갈량의 입장에선) 급히 싸우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 선제에게 늘 명하길 지중(持重)하며 그들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 여기서 僑軍遠寇(교군원구)는 ‘멀리 침범해 와서 자국을 벗어나 위나라 영토에서 둔전하며 객지 생활하는 원정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보입니다. 

 

제갈량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선제가 출전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선제에게 건괵(巾幗- 부녀자들이 쓰던 두건과 머리장식)과 부인들이 쓰는 장신구(婦人之飾)를 보냈다. 선제가 노하여 표를 올려 결전(決戰)할 것을 청하자 천자가 불허하고는 강직한 신하 위위(衛尉) 신비(辛毗)를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군사(軍師)가 되어 이를 제지하게 했다. 그 뒤 제갈량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자 선제가 장차 출전하여 이에 응하려 했는데,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軍門)에 서서 막으니 선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촉장(蜀將) 강유(姜維)는 신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이르길,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당도했으니 적(賊)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 하니 제갈량이 말했다, 

 

“그는 본래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데 천자에게 결전을 굳게 청한 이유는 그의 군사들에게 무(武)를 과시하자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저들이 우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굳이 결전을 청하겠소!”

  

선제의 동생 사마부(司馬孚)가 서신을 보내 군사(軍事)에 관해 물었다. 선제가 답장을 보내 말했다,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不見機),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대치한지 백여 일 만에 때마침 제갈량이 병으로 죽자 촉의 제장들이 둔영을 불태우고 달아났고, 백성들이 급히 달려와 알려주니 선제가 출병해 이를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長史) 양의(楊儀)가 군기를 되돌리고 북을 치니 마치 선제와 맞서려는 듯 했다. 선제는 궁지에 몰린 적은 핍박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니 이에 양의는 결진(結陣)한 채 떠났다. 

 

다음 날 제갈량의 영루(營壘)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遺事)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圖書)와 양곡(糧穀)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 선제는 그가 필시 죽었음을 알아채고는 이르길,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


라 하였다. 신비(辛毗)는 제갈량이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선제가 말했다,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서(軍書), 밀계(密計), 병마(兵馬-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糧穀)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오장(五藏)을 (※) 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 앞의 군서, 밀계등과 연관되어 五라는 숫자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오장육부할 때 오장처럼 ‘중요한 것’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촉군이 퇴각하며 병마를 내버렸을 리는 없으므로 兵馬糧穀을 兵馬 / 糧穀으로 나누지 않고 ‘병마가 먹는 양곡’으로 풀었습니다.

 

관중(關中)에 질려(蒺藜-남가새 ;마름쇠)가 많다는 말을 듣고 선제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마보(馬步-기병과 보병)가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赤岸)에 도착한 뒤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이 이에 관해 속어(諺)를 지어 이르길, 


“죽은 제갈(諸葛)이 산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死諸葛走生仲達)고 하였다. 선제가 이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이전에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선제가 물었다, 


“제갈공(諸葛公)의 기거(起居-일상생활)가 어떠하고 음식은 얼마나 드시오?” (食可幾米) [5] 


[5] <食可幾米> - 태평어람 권378에서 위(魏) 명제(明帝)가 조식(曹植)에게 보낸 조서를 인용하여 “食幾許米(식기허미)”라 했으니 幾許(기허)가 즉 幾何(기하-얼마 만큼인가)라는 말이며 한나라, 위나라 때 보통 쓰던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幾 아래(뒤)에 응당 許 자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食可幾米 → 食可幾許米…로 보인다는 말)


사자가 대답했다,


“3-4 승(升)을 드십니다.”


이어 정사(政事)에 관해 물으니 대답했다,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그 뒤 선제가 다른 이에게 말하길,


“제갈공명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제갈량의 부장인 양의와 위연이 권력을 다투니 양의가 위연을 참수하고 그의 군사를 아울렀다. 선제가 이를 틈타 진격하고자 했으나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청룡 3년(235), 태위로 올리고 봉읍을 더욱 늘려주었다. 촉장 마대(馬岱)가 침범하니, 선제가 장군 우금(牛金)을 보내 이를 공격해 패주시키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도(武都) 저왕(氐王-저족의 왕) 부쌍(苻雙), 강단(强端)이 그들의 부속 6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6]

 

[6] 촉지 장억전, 화양국지 권7 에서 (건흥 14년=236년) 무도 저왕 부건(苻健)이 촉에 항복했고 그의 동생은 무리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다고 했다. 부쌍(苻雙)은 저왕(氐王)이 아니니 王 자는 연문(衍文-잘못 덧붙여진 군더더기 글자)으로 보인다.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어 선제는 장안(長安)의 곡식 5백만 곡(斛)을 경사(京師)로 보냈다.

  

청룡 4년(236), 흰 사슴(白鹿)을 잡아 헌상했다. 천자가 말했다, 

 

“옛날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좌할 때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이제 그대가 섬서(陝西)에서 대임을 맡아 흰 사슴을 헌상하니, 충성(忠誠)이 서로 부합하여 천년이 한 마음으로 방가(邦家-국가)를 다스리는 것으로 어찌 길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가 모반하자 선제를 경사(京師)로 불렀다. 천자가 이르길,


※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 공손연의 자(字)인 문의(文懿)로 표기한 것 같고, 이후로도 [진서]에서는 계속 공손연을 (공손)문의로 적고 있습니다.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계(上計-상책)입니다. 요수(遼水)에 의지해 대군(大軍)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次計)입니다. (그러나) 만약 앉아서 양평(襄平)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오직 현명한 자만이 능히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깊이 헤아려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遼水)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당시 궁실(宮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군려(軍旅-전쟁; 군대)가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선제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옛날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영건(營建)하고 소하(蕭何)가 미앙(未央)(궁)을 지었으니 오늘날 궁실(宮室)이 미비한 것은 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內務→궁실 수축)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경초(景初) 2년(238년) 우금(牛金), 호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수도)를 출발했다. 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西明門)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司馬孚),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溫)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郡守), 전농(典農)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부로(父老-노인)와 고구(故舊-옛 친구,지인)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선제는 탄식(嘆息)하고 창연(悵然)해하다 감흥이 일자(有感) 노래(歌)를 읊었다.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 리를 깨끗이 하고 온 세상을 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귀로(歸老-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냄)해 무양(舞陽)에서 대죄(待罪)하겠노라.” (※ 당시 사마의는 무양후)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문의(文懿-공손연)는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의지해 견벽(堅壁)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에게 맞섰다. 


선제가 대군을 결집해(盛兵)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賊)이 정예병을 다하여(盡銳) 이를 향해 나아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賊)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作長圍) 적(賊)을 내버려두고 양평(襄平)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作圍)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을 공격하면 그 계책에 곧바로 떨어지게 되니 이는 바로 왕읍(王邑)이 곤양(昆陽)에서 치욕을 당한 원인이었소. 옛 사람이 이르길,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불 나와 더불어 (성을 나와) 싸우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소.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巢窟)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襄平)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陣)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賊)은 선제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선제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逆擊)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襄平)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당초 문의(文懿-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聲援)하고 문의(文懿)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공(司馬公)은 용병에 능하고 변화(變化)가 신(神)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所向無前)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霖潦) 홍수가 나 물이 평지에서도 수 척에 이르자 삼군(三軍)이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선제가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都督令史)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賊)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司馬)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上庸)을 공격할 때는 8부(部)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一旬之半) (※)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孟達)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 사마의가 상용의 맹달을 공격한 기간 / 


앞에 맹달공격을 다룬 부분에서는 “八道攻之, 旬有六日, 達甥鄧賢、將李輔等開門出降. 斬達, 傳首京師.”라 하여 16일이라 했으나, 여기서는  “一旬之半, 拔堅城, 斬孟達” 열흘의 절반, 즉 5-6일 이라 해서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이에 관련된 위략(삼국지 명제기 주)의 기술은 이렇습니다. 


“선왕(宣王-사마의)이 맹달의 장수 이보와 생질 등현을 꾀자 등현 등이 성문을 열고 사마의군을 맞아들였다. 맹달은 포위된 지 16일 만에 패망했고, 그의 수급은 낙양의 사방으로 뚫린 대로에서 불태워졌다.” 


따라서 사마의 군이 성을 공격한 기간은 16일이 맞는 것 같고(진군기간 8일을 포함하면 통틀어 한 달 정도가 걸린 셈), 여기서 사마 진규의 말은 글자가 잘못 전해졌거나 or 대화 상대방인 사마의를 의식해 다소 과장해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한 달로 1년을 도모하는 셈이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소? 병력은 넷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설령 그 중 절반을 잃더라도 도리어 당적할 수 있었소. 그리하여 사상자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군량으로 더불어 경쟁한 것이오. 지금은 적의 군사가 우리보다 많아 적은 굶주리고 우리는 배부르며, 큰 비가 내리는 것이 이와 같아 공력을 펼칠 수 없으니, 비록 급히 서두른다 한들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경사(京師)를 출발한 이래 적이 공격하는 것을 우려하진 않았으나 다만 적이 달아나는 것을 걱정했소. 적의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우리의) 위락(울타리,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우마를 약탈하고 땔나무 캐는 것을 노략질한다면 이는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오. 


무릇 병(兵)은 궤도(속임수, 기만술)이고 일의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하오.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이 때문에 비록 굶주리고 곤궁해도 속수(束手-손을 묶고 항복함)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천자가 말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合圍)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방패, 전차, 사다리, 충차를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이무렵 색이 희고 망렵(芒鬣-빛나는 갈기털? 꼬리?)이 있는 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梁水)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文懿)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相國) 왕건, 어사대부 유보(柳甫)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면박(面縛-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임)할 것이라 청했다. 선제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王建)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文懿)에게 고했다. 

 

“옛날 초(楚)나라와 정(鄭)나라는 대등한 나라(列國)였으나 정백(鄭伯)은 도리어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며 초나라 군을 영접했다. 나는 황제의 신하로 지위가 상공인데 왕건 등은 나에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니 어찌 초나라,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리!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文懿)가 다시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선제가 위연에게 말했다, 

 

“군사의 대요(大要)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뿐이다. 너희는 면박(面縛)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내 무얼 어찌하겠단 말인가?” 

 

문의(文懿)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돌출(突出)하자 선제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 가의 장성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신구(新舊)를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인골을 쌓은 것. 일종의 전승기념비)을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戶), 30여 만 구(口)를 거두었다.

 

당초 문의(文懿)는 숙부인 공손공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綸直), 가범(賈範)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간절히 간언하니 문의(文懿)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선제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墓)를 봉(封-흙더미를 쌓아 북돋음)하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 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文懿)에게 연루되어 그르쳐진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中國人)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襦)를 청했으나 선제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하길,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


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물(官物)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계(薊-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곤양(昆陽)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 무양, 곤양. 둘 다 예주 영천군 소속) 

 

당초 선제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르길, 


“내 얼굴을 보시오.”


라 하여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선제에게 조령을 내려 지름길로 가서 관중(關中)을 진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백옥(白屋)에 이르렀을 때 선제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수조(手詔-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선제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추봉거(追鋒車)를 타고 밤낮으로 겸행(兼行)하여 백옥(白屋)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 침실 안으로 인도되어 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선제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가 선제의 손을 잡고 제왕(조방曹芳)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제왕(齊王-조방曹芳)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侍中), 지절(持節), 도독중외제군(중앙과 바깥의 여러 군무를 도독), 녹상서사로 올라 조상과 함께 각기 군사 3천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은 상서 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선제를 대사마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선제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太傅)로 삼았다. 

 

입전불추(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음), 찬배불명(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음), 검리상전(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음)하도록 하니 한나라 때 소하의 고사(故事-전례)와 같았다. 혼인과 장례비용은 관(官)에서 대어주었고, 세자(世子) 사마사(司馬師)를 산기상시로 삼고 자제(子弟-아들에 대한 경칭) 세 명을 열후(列侯)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선제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子弟)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

 

정시 원년(240년) 봄 정월, 동왜(東倭)가 중역(重譯-여러 나라 말을 거쳐 거듭 통역함)하며 공물을 바치고 언기(焉耆), 위수(危須)의 여러 나라들(※ 언기, 위수는 서역방면의 나라)과 약수(弱水) 이남의 선비(鮮卑) 명왕(名王)이 모두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자는 이를 재상의 공으로 돌려 다시 선제의 봉읍을 늘려주었다. 

  

당초 위(魏) 명제(明帝)는 궁실 수축을 좋아하고 규격, 양식이 화려해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선제가 요동(遼東)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이 천 개에 달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모두 파하도록 상주하고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니 천하가 기뻐하며 의지했다.

 

정시 2년(241)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芍陂)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孫倫)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柤中)을 약탈하자 선제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廟堂)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6월, 그리하여 제군(諸軍)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선제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주선(舟船-배),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 천자가 시중상시를 보내 완(宛)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가을 7월, 봉읍을 늘려 언(郾), 임영(臨潁)을 내리니 예전과 합쳐 모두 4개 현(※ 무양, 곤양, 언, 임영)에 식읍이 1만 호가 되었고, 자제(子弟) 11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선제의 훈덕(勳德)이 날로 높아졌으나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게 처신했다. 향읍의 덕망 있는 원로인 태상(太常) 상림(常林)은 그들이 매번 벼슬을 받는 것을 보고는, 늘 자제들을 타이르며 말했다, 

 

“가득 찬 것은 도가(道家)에서 꺼리는 바다. 사시(四時)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

  

정시 3년(242) 봄, 천자가 황고(皇考-죽은 부친의 존칭) 경조윤(京兆尹-즉, 사마방)을 추봉(追封)해 무양성후(舞陽成侯)의 시호를 내렸다.

  

3월, 주청하여 광조거(廣漕渠)를 뚫고 하수의 물을 끌어 변수(汴水-황하의 지류)로 유입시키고 동남쪽 저수지들에 물을 대니 비로소 회수 이북에서 크게 농사지었다.

 

당초 오나라가 장수 제갈각(諸葛恪)을 보내 환(皖-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케 하여 변경지역에 이에 괴로움을 받으니 선제가 몸소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 여럿이 이르길, 


‘적(賊)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관병(官兵-위나라 군대)을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다.’


고 말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이제 그들의 성(城)을 공격해 그 변화를 살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이는 조정(廟)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감히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사세상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정시 4년(243) 가을 9월, 선제가 제군(諸軍)을 이끌고 제갈각을 공격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군이 서(舒-여강군 서현)에 당도하자 제갈각은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선제는 적을 멸하는 요체는 군량을 비축하는 데 있다고 여기니 이에 둔수(屯守)를 크게 일으키고 회양(淮陽), 백척(百尺)의 두 수로(渠)(회양거, 백척거)를 널리 열고 또한 영수(潁水)의 남북에 있는 저수지들을 수리하여 (개전漑田이) 만여 경(頃)에 이르렀다. 이 이후로 회북(淮北)에 창유(倉庾-쌀 창고)가 도처에 많게 되었고 수양(壽陽-수춘)에서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9] 농관(農官), 둔병(屯兵-둔전병)이 서로 잇달았다.

 

[9] 壽陽(수양)은 (진서) 식화지에는 壽春(수춘)으로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동진(東晉) 때 처음으로 壽春(수춘)을 壽陽(수양)으로 고쳤으니 이곳에서는 응당 壽春(수춘)으로 적어야 한다. 진서 중에서 수춘, 수양이 뒤섞여 나오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는 이하에서 다시 교정하지 않는다.

 

정시 5년(244) 정월, 선제가 회남(淮南)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사자에게 절(節)을 들여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상서 등양(鄧颺), 이승(李勝)등은 조상이 공명(功名)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촉(蜀)을 정벌하도록 권했다. 선제가 이를 반대했으나 막을 수 없었는데 조상은 과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정시 6년(245) 가을 8월, 조상이 중루중견영을 없애고 그 군사들을 자신의 동생인 중령군 조희(曹羲)에게 속하게 했다. 선제는 전대 황제 때부터의 오랜 제도라 하여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겨울 12월, 천자가 선제에게 조서를 내려 조회할 때 수레를 타고 어전에 오르도록 했다.

 

정시 7년(246) 봄 정월, 오나라가 조중을 침범하자 이민족과 중국인 만여 가(家)가 침범을 피해 북쪽으로 면수를 건넜다. 선제는 면수 이남이 적과 가까우므로 만약 백성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필시 침범받을 것이므로 의당 임시로 백성을 면수 이북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상(曹爽)이 말했다, 

 

“지금 면수 이남을 잘 닦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머물게 하는 것은 장책(長策)이 아니오.” 

 

선제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무릇 물건은 안전한 땅에 두면 안전하고 위태로운 땅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런 고로 병서(兵書)에서 이르길, ‘성패는 형(形)에 달려있고 안위는 세(勢)에 달려 있다’고 했소. 형세는 여러 사람을 부림의 요체이니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소.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沔水)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 이남의 제군(諸軍)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조중(柤中)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소?” 

 

조상이 이에 따르지 않고 끝내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과연 적이 조중(柤中)을 습격해 격파하니 희생당한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정시 8년(247) 4월, 부인(夫人) 장씨(張氏)가 훙(薨)했다. 

 

조상이 하안, 등양, 정밀의 모책을 써서 태후를 영녕궁(永寧宮)으로 옮기고 조정을 전횡하니 형제가 함께 금병(禁兵-친위군)을 관장하고 친당(親黨)을 많이 심어놓고 제도를 여러 차례 고쳤다. 선제가 이를 제지할 수 없었고 이에 조상과의 사이에 틈(불화)이 생기게 되었다.

 

5월, 선제는 병들었다 칭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에 관해 노래하길, “하(何), 등(鄧), 정(丁)이 경성(京城)을 어지럽히는구나.”


라고 했다.

  

정시 9년(248) 봄 3월, 황문(黃門) 장당(張當)이 사사로이 액정(掖庭-비빈, 궁녀들의 거처)의 재인(才人-궁녀의 관직명) 석영(石英) 등 11명을 뽑아 조상에게 바쳐 기인(伎人-가녀歌女)으로 삼게 했다. 조상과 하안은 선제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으니 장당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다. 선제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曹爽)의 무리들도 선제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 

 

때마침 하남윤 이승이 형주(荊州)에 부임하게 되자 선제에게 와서 동태를 살폈다. 선제가 병이 깊은 것처럼 속이니 2명의 계집종에게 시중들게 하고 옷을 잡고 있었으나 옷자락이 땅에 끌렸다. 입을 가리키며 목이 마르다고 하니 계집중이 죽을 올렸는데 선제는 죽그릇을 잡지 못했고 죽이 모두 흘러 가슴자락을 적셨다. 

 

이승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명공(明公)께서 예전 풍(風)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尊體)가 이 지경일 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선제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코앞에 닥쳤소. 그대가 병주에 가게 되었구려. 병주는 호(胡-흉노)와 가까우니 잘 방비하도록 하시오.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형제를 부탁하오.” 

 

이승이 말했다, 


“송구하게도 본주(本州)로 돌아가게 된 것이지 병주(幷州)가 아닙니다.” (※이승이 형주 남양군 출신이므로 형주를 본주本州라 표현) 

 

그러자 선제가 이를 혼동하며 말했다, 


“이제 막 병주(幷州)에 도착했다고?”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하게도 형주(荊州)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내가 늙고 기운이 쇠해 그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소. 이제 본주로 돌아간다니 성덕(盛德) 장렬히 공훈을 잘 세우도록 하시오!” 

 

이승이 물러나와 조상에게 고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시체와 다름없어 기운이 겨우 남아 있고 육체와 정신이 이미 분리되었으니 족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뒷날 또 말했다, 


“태부가 다시 회복되기 어려우니 가히 애처로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조상 등은 다시 선제를 방비하지 않았다.

  

가평 원년(249년) 봄 정월 갑오일(6일), 천자가 고평릉을 참배하자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갔다. 이날 태백(太白-금성)이 달을 범했다. 이에 선제는 영녕궁의 태후(太后)에게 상주해 조상 형제를 파면하도록 했다.

 

당시 경제(景帝-사마사)는 중호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문(司馬門)에 주둔했다. 선제는 궐 아래에서 포진하고 조상의 문(※조상 세력이 관장하거나 장악하고 있던 문?)을 지나려 했다. 조상의 장하독(帳下督) 엄세(嚴世)가 문루에 올라 노를 당겨 선제를 쏘려 하니 손겸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사태가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소.”  


화살을 시위에 세 번 얹었으나 세 번을 말리며 매번 그의 팔꿈치를 당기니 발사하지 못했다. 

 

대사농 환범(桓範)이 성문을 나가 조상에게로 나아가자 장제(蔣濟)가 선제에게 말했다, 


“지낭(智囊-꾀주머니)이 갔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駑馬戀短豆-노마연단두) [10]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이오.” 

 

그리고는 사도 고유(高柔)에게 부절을 내려 대장군의 사무를 대행하여 조상의 영(營)을 거느리게 하며 이르길, 


“그대가 바로 주발(周勃)이오.”  (※)


※ 주발은 한나라 건국공신으로 여태후가 죽은 뒤 진평, 관영 등과 더불어 여씨 일족을 제거해 한나라 초 전횡하던 외척세력을 제압했는데,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주발이라 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했다. 태복(太僕) 왕관(王觀)에게 명해 중령군의 직을 대행하며 조희(曹羲)의 영(營)을 관장하도록 했다. 

 

선제가 친히 태위 장제(蔣濟) 등을 거느리고 군대를 지휘해 천자를 영접하기 위해 출군하고 낙수(洛水) 부교(浮橋)에 주둔한 뒤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선제(즉 명제)께서 폐하와 진왕(秦王-조순), 그리고 신을 불러 어상에 오르게 해 신의 팔을 잡고 이르길 ‘심히 뒷일을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은 고명을 저버리고 나라의 제도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람되게 스스로를 윗사람에 견주고 밖으로는 위엄와 권력을 전단하고 있습니다. 백관의 요직에는 모두 자신과 친한 사람을 두고 예전부터 숙위하던 자들은 모두 내쫓겼습니다. 조정에 뿌리를 내리고 점거해 서로 결탁하니 그렇게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것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또한 황문(黃門)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삼고 오로지 함께 결탁하며 신기(神器)를 정탐하니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마다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폐하가 다만 기좌(寄坐-남에게 빌붙어 있음, 손님의 지위에 있음) 하니 어찌 오래도록 안전하겠습니까? 이는 선제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御床)에 오르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늙고 쇠약한 몸이나 어찌 감히 지난 날 선제의 말씀을 잊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전횡하니 진(秦)나라가 이 때문에 망했고, 여씨와 곽씨를 일찍 끊어냈기에 한나라 제업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전대의 일이며 지금은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공경 군신들이 모두 이르길 조상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지녔고 그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며 숙위(宿衛)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황태후께 상주하니 상주한 대로 시행하라고 황태후께서 명하셨습니다. 주관하는 자와 황문령(黃門令)에 신이 임의로 명해 조상, 조희(曹羲), 조훈(曹訓)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기 원래 관직과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게 하고, 만약 황제의 수레를 계속 억류시킨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신이 병든 몸으로 임의로 군사를 거느리고 낙수 부교(浮橋)로 온 것은 비상사태를 살피기 위함입니다.”

 

조상이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지 않고 황제의 수레를 이수(伊水) 남쪽에서 유숙하게 하고는 나무를 베어 녹각을 만들고 둔병(屯兵-둔전병) 수천 명을 징발해 수비했다. 환범은 과연 천자를 모시고 허창(許昌)으로 행차해 격문을 돌려 천하의 군사를 부르도록 조상에게 권했으나 조상이 이 계책을 쓰지 않고, 밤중에 시중 허윤(許允), 상서 진태(陳泰)를 선제에게 보내 선제의 의중을 살폈다. 선제가 그의 과실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에 관한 처벌은 면관(免官)하는데 그친다고 했다. 진태가 돌아와 조상에게 보고하고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도록 권했다. 

 

선제는 또 조상이 신임하던 전중교위 윤대목(尹大目)을 보내 조상을 효유하게 하여 낙수(洛水)를 가리키며 맹세하니 조상이 이를 믿었다. 환범 등이 고금의 사례를 인용하며 백방으로 간언하고 설득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이르길, 


“사마공은 정히 내 권력을 뺏고자 할 뿐이오. 내가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간다면 부가옹(富家翁-부자)의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환범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경에 연루되어 내 일족이 멸해지게 되었소!” 

 

마침내 선제의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렸다. 얼마 후 유사(有司-담당관원)가 황문 장당(張當)의 죄상을 아뢰고 아울러 조상이 하안 등과 함께 모반을 꾸민 일을 발고하니 이에 조상 형제와 그 일당인 하안, 정밀, 등양, 필궤, 이승, 환범 등을 체포하고 모두 주살했다. 장제가 이르길, 


“조상의 부친인 조진(曹眞)의 공훈을 볼 때 제사를 잇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고 했으나 (※ 조상은 살려주자는 말) 선제가 들어주지 않았다.

 

당초 조상의 사마(司馬) 노지(魯芝), 주부 양종(楊綜)이 궐문의 군사를 베고 조상에게로 달아났었다. 조상이 장차 죄를 받으려 하자 노지, 양종이 울며 간언하길 


“공이 이윤, 주공과 같은 대임을 맡아 천자를 끼고 천위에 의지하는데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버리고 처형장으로 나아가려 하시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사(有司)가 주청하여 노지, 양종을 체포해 과죄(科罪-죄를 결정함)하라 하자 선제가 이들을 용서하며 말했다, 


“이는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권하기 위함이오.”

 

2월, 천자가 선제를 승상으로 삼고 영천군의 번창(繁昌), 언릉(鄢陵), 신급(新汲), 부성(父城)을 봉읍으로 더해 예전과 합쳐 모두 8개 현에 2만 호가 되었고, 상주할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게 했다. 승상 직은 굳게 사양했다.

  

겨울 12월, 구석(九錫)의 예(禮)를 더하고 조회불배(朝會不拜–조회할 때 절하지 않음)하게 했다. 구석(九錫)은 굳게 사양했다.

 

가평 2년(250) 봄 정월, 천자가 선제에게 명해 낙양에 종묘를 세우도록 하고, 좌우 장사를 두고, 관속을 늘리고, 사인(舍人)은 10명을 채우고, 매년 연속(掾屬) 중에서 천거해 어사(御史), 수재(秀才) 각기 1명씩을 임명하고, 관기 1백 명과 고취(鼓吹) 14명을 늘리고, 선제의 아들 사마융(司馬肜)을 평락정후(平樂亭侯)에, 사마륜(司馬倫)을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했다. 

 

선제가 오랜 병으로 조청(조현朝見.황제를 배알함)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선제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

 

연주자사 영호우(令狐愚), 태위 왕릉(王淩)이 선제를 배반하고 초왕 조표(曹彪)를 옹립할 계책을 꾸몄다.

 

가평 3년(251) 봄 정월, 왕릉이 오나라가 도수(塗水)를 막았다고 속이며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선제가 비밀히 그 계책을 알아채고 들어주지 않았다.

  

여름 4월, 선제가 친히 중군(中軍)을 통수하며 배를 띄워 물을 따라 내려가 9일 만에 감성(甘城)에 도착했다. 왕릉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무구(武丘)에서 선제를 영접했는데 물가에서 면박한 채로 말했다, 


“저 왕릉에게 죄가 있으면 공이 서신을 보내 저를 부르면 되지 어찌하여 몸소 오셨습니까!” 

 

선제가 말했다, 


“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리고는 왕릉을 경사로 송환했다. 도중에 가규의 묘(사당)를 지나자 왕릉이 외쳤다, “가양도! 나 왕릉이 대위(大魏)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 가규의 자가 양도梁道. [삼국지] 왕릉전에 의하면 왕릉이 가규와 서로 친했다고 함)

 

항(項-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러 짐독을 먹고 죽었다. 그의 남은 일당을 체포해 모두 삼족을 멸하고 아울러 조표(曹彪-왕릉이 옹립하려던 초왕 조표)를 죽였다. 위나라의 여러 왕공들을 모두 붙잡아 업(鄴)에 두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해 이들을 감찰(監察)하여 서로 교관(交關)하지 못하게 했다.

  

천자가 시중 위탄(韋誕)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오지(五池)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선제가 감성(甘城)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또 겸대홍려(兼大鴻臚), 태복 유의(庾嶷)를 보내 절을 주면서(持節)하여, 선제에게 책명을 내려 상국으로 임명하고 안평군공에 봉하고 선제의 손자와 형의 아들 각기 1명을 열후로 삼았으며, 그 앞뒤로 식읍이 5만 호, 후로 봉해진 자가 19명에 달했다. 상국(相國), 안평군공(郡公)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6월, 선제가 병으로 앓아누워 가규, 왕릉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가을 8월 무인일(5일), 수도에서 붕(崩-천자의 죽음)하니 이때 나이 73세였다. (※사마의 생몰: 179-251) 

 

천자가 소복(素服)을 입고 조문하고 상장(喪葬)의 예법은 한나라 곽광(霍光)의 고사(故事-전례)에 의거하고 상국, 군공을 추증했다. 동생인 사마부(司馬孚)가 표(表)를 올려 고인의 뜻을 진술하며 군공(郡公)과 온량거(轀輬車)를 사양했다.

  

9월 경신일(17일), 하음(河陰)에 매장하고 시호를 내려 문(文)이라 하고(무양문후舞陽文侯) 뒤에 선문(宣文)으로 고쳤다.(무양선문후舞陽宣文侯) [12] 

 

당초 미리 장례에 관한 유언을 지어 수양산(首陽山)에 흙을 파서 매장하고 분묘를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不墳不樹) 고명(顧命) 3편을 지었는데, 평상복으로 염(斂)하고 부장품을 두지 말고 뒤에 죽는 자를 자신의 묘에 합장하지 말라고 했다. 

 

진국(晉國)이 처음 세워지고 선왕(宣王)으로 추존되었다. 무제(武帝-사마염)가 위나라의 선양을 받자 존호를 올려 선황제(宣皇帝)라 하고 능(陵)을 고원(高原)이라 하고 묘호를 고조(高祖)라 칭했다.

  

선제는 내심 꺼리는 바가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고, 시기심이 있고 임기응변이 많았다. 위무제(조조)는 선제에게 웅대하고 호방한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에게 낭고상(狼顧相)이 있음을 듣고는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그를 불러 오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게 하니 얼굴은 곧바로 뒤를 향하는데 몸은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세 마리 말이 한 구유(槽 -조씨의 조曹를 상징)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고는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래서 태자 조비(曹丕)에게 이르길, 


“사마의(司馬懿)는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필시 너희 집안일에 관여할 것이다.”


라 하였다. 태자가 평소 선제와 친하여 늘 서로 비호했는데 이 때문에 총행을 잃게 되었다. 이에 선제는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이르러 이를 모두 직접 챙기니 이로 말미암아 위무제가 마침내 그에 관해 안심하게 되었다.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를 평정하자 대거 살륙을 행했다. 조상을 주살할 때는 그의 일파들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자매(姑姊妹-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죽였고, 그 뒤 위나라의 정(鼎)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명제(明帝-동진東晉의 명제 사마소司馬紹) 때 왕도(王導)가 모시고 배석했다. 명제가 전세(前世-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선제가 창업(創業)을 시작한 일을 진술하고 더불어 문제(文帝-사마소) 말년의 고귀향공(高貴鄕公) 에 관한 일(사마소가 조모曹髦를 죽인 일)을 진술했다. 명제(明帝)가 얼굴을 상(床)에 묻으며 말했다,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晉)의 제업이 어찌 장원(長遠-길고 멂)하겠는가!” 


그의 의심많고 잔인한 행적을 보면 대저 낭고(狼顧)라는 말에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제(制)하여 말한다. 

 

※ [진서]에서 권1 선제기, 권3 무제기, 권54 육기전, 권80 왕희지전의 논평은 制曰로 시작하여 당태종이 직접 쓴 것임을 표시(制는 황제의 문체 중 하나). 즉,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사마의를 평한 글입니다.  

 

무릇 천지의 크기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국가의 존귀함에서는 천자를 으뜸으로 삼는다.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무상하고 흥망에 운(運)이 있다. 이런 고로 오제(五帝)의 윗대에서는 만승에 천자가 되는 것을 근심거리로 여겼으나, 삼왕(三王-하 은왕, 상 탕왕, 주 문왕) 이후로는 이를 근심거리가 아니라 즐거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지력(智力)을 경쟁하고 이해(利害)를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로 병탄하고 강하고 약한 나라들이 서로 습격하였다. 위(魏)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세 나라가 솥발처럼 대치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고 분무(氛霧-안개. 난세를 비유)가 도처에 드리웠다. 

 

선황(宣皇-사마의)은 탁월한 재능으로 시운에 응해 임금을 보좌하고 문(文)으로 이어 다스리고 무(武)로써 위세를 떨쳤다. 남을 부림이 자신을 대하는 것과 같고 현인을 구함은 늘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의 정(情)은 깊고 험해 헤아리기 어려웠고 그의 성(性)은 너그러워 능히 남을 포용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자신의 재주를 감추고 세속의 티끌과 함께함)하여 여시서권(與時舒卷-시세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섬)하고 즙린잠익(戢鱗潛翼-비늘을 거두고 날개를 숨겨 때를 기다림)하여 사촉풍운(思屬風雲-풍운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임?)하였다. 이미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충성스러운 것처럼 꾸미고 장차 위태로워지려는 명운에 처해 평안함을 구했다. 

 

살펴보건대 그가 웅략(雄略)으로써 안으로 단(斷)하고 좋은 꾀로써 밖으로 결단하고, 공손(公孫-공손연)을 백일 만에 죽이고 맹달(孟達)을 열흘 남짓 만에 사로잡았으니, 스스로 군사를 움직일 때는 신(神)과 같고 모책을 씀에 있어 두 번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 그 뒤 군사를 이끌고 서쪽을 정벌해 제갈량과 서로 대치했다. 그가 갑병(甲兵)을 단속하며 본래 싸우려는 뜻이 없었으나 제갈량에게서 건괵(巾幗)을 전해받자 바야흐로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에 서서 제지하니 웅대한 계획으로 뜻을 굽혔고, 천리 길을 가서 싸움을 청해 거짓으로 위세를 보이고자 했다. 게다가 진(秦), 촉(蜀) 땅의 사람들은 용감함과 나약함에 있어 서로 대적할 바가 못 되고 도로의 평탄함과 험함에 있어 그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서로 같지 않았으니 이로써 공을 다투었다면 그가 이로웠으리라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위나라는 용감하고 도로가 평탄해 편안하나 촉은 그 반대였으니 적극적으로 쟁봉 했다면 이겼으리라는 말.) 그러나 도리어 군문을 닫고 보루를 굳게 하며 감히 쟁봉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실(實)을 겁내어 전진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허(虛)를 의심해 오히려 달아나니, 좋은 장수의 도(道)가 여기에서 그르쳐졌구나!


※ 즉 당태종 이세민은 사마의가 제갈량과 싸우지 못하고 지켜서 이긴 것을 은근히 비꼬고 있습니다.

 

문제(文帝-조비) 때에는 임금을 보좌하며 권세가 컸으니 허창에서 소하와 같은 임무를 맡고 숭화전에서 곽광(霍光) 때보다 더한 부탁을 받았다. 응당 성심과 절의를 다했다면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과 그 이름을 나란히 했으리라. 명제(조예)가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이르러서는 동량(棟梁-대들보. 나라의 중임을 비유하는 듯)을 그에게 맡기니, 두 임금(二主-문제, 명제)의 유조를 받고 3조(三朝-문제, 명제, 제왕 조방)를 좌명(佐命)했고, 인사지탁(忍死之託-차마 죽지못하고 오기를 기다렸다 부탁함. 명제가 죽을 때의 일을 가리킴)을 받들었으나 일찍이 목숨을 다해 보답하지 않았다. 천자가 바깥에 있을 때 안에서 갑병(甲兵)을 일으키고 후사를 부탁했던 명제 능(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거 서로 주륙하니 정신(貞臣-충정한 신하)의 지체로서 어찌 이 같을 수 있는가! 그가 선(善)을 다했다는 것은 이로 인해 의심스럽다. 

 

무릇 정토(征討)하는 책략에 있어 어찌 동쪽에서는 지혜롭다가 서쪽에서는 우매했겠는가? 보좌하는 마음에 있어 어찌 전대에서는 충성스럽다가 후대에 와서 역심을 품었겠는가? 이 때문에 진(晉) 명제(明帝)는 얼굴을 묻으며 그의 선조가 속임수로 공을 이룬 것을 수치스러워 하고, 석륵(石勒-후조後趙의 창업군주)은 거리낌 없이 말하며 사마의가 간회(姦回-간교)하게 대업을 정한 것을 비웃었다.(※) 


※ 석륵(石勒)이 조조와 사마의를 비웃은 일 / [진서] 권105 석륵 재기(載記) 


석륵(石勒)이 고구려(高句麗), 우문옥고(宇文屋孤)의 사신을 대접하다 주흥이 오르자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짐은 자고 이래로 기업을 열었던 임금 중 누구와 나란한가?” 


서광이 대답했다, 


“폐하의 신무(神武)와 주략(籌略)은 고황(高皇-한고제 유방)를 넘어서고 빼어난 재주와 탁월함은 위조(魏祖-위태조 조조)보다 초절하니 3왕(三王-하 우왕,상 탕왕,주 무왕) 이래 가히 견줄 만한 이가 없습니다. 가히 헌원(軒轅-황제黃帝)에 버금간다 할 수 있습니다.” 


석륵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을 모르리오. 경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짐이 만약 고황(高皇)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섬겨 한신, 팽월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다. 짐이 만약 광무(光武-광무제)를 만났다면 응당 중원(中原)에서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함께 말달렸을 것이나 누구 손에 사슴이 죽었을지는(누가 천하를 차지했을지는) 알 수 없다. 대장부가 일을 행함에 응당 정정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밝고 환해야 하며, 끝내 조맹덕(曹孟德-조조)이나 사마중달(司馬仲達-사마의) 부자(父子)처럼 남의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여우처럼 아첨하여 천하를 차지할 수는 없다. 짐은 응당 이 두 유씨(한고조 유방, 광무제 유수)의 중간에 있으니 어찌 헌원에 견주겠는가!” 그의 뭇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를 외쳤다.


옛사람이 이르길, 


“3년 동안 선(善)을 쌓아도 이를 아는 이가 적으나 하루만 악(惡)을 행해도 천하에 널리 알려진다.”


고 했으니 가히 그러하지 아니한가! 비록 스스로 당년에는 허물을 숨기더라도 끝내 후대에는 비웃음을 당하게 되니, 이는 또한 종을 훔치며 자신의 귀를 가리고는 뭇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는 것과 같고, 단단히 마음먹고 금을 훔치고는(銳意盜金) 저자 사람들이 보지 못하리라 여기는 것과 같다. 이로써 가까운 것을 탐하는 자는 먼 것을 잃고 이로움에 탐닉하는 자는 명성을 손상하고, 만약 자신에게 손해를 끼쳐 남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화를 끼치고 자신을 복되게 함을 알 수 있다.

 

천리에 순응해 움직이면 일을 이루기 쉽고 천시에 위배해 움직이면 공을 이루기 어렵다. 하물며 진(晉)의 기업을 미처 다 이루지도 못했는데 복운이 남아있는 위(魏)를 핍박했겠는가? 비록 다시 천지에 도를 행하고 온 백성에 덕을 베풀어도 하늘이 그 때를 열지 않아 보위(寶位)가 저해되면 지력으로 경쟁할 수 없고 무력으로 다툴 수 없으니, 비록 복이 그의 후대에까지 흘렀어도 자신은 끝내 북면(北面)한 채(신하인 채로) 죽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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