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항재기

 [[모용준재기]]에서 분할




○ 한항(韓恒)




 


한항(韓恒)은 자(字)가 경산(景山)이고 관진(灌津)(※) 사람이다.


 


부친인 한묵(韓黙)은 학행(學行,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한항은 젊을때부터 능히 속문(屬文,글을 지음)하고 같은 군(郡)의 장재(張載)에게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기어 배움)하였는데, 장재가 그를 남다르게 여겨 ‘왕을 보좌할 재주’(王佐才)라고 말하였다. 신장은 8척 1촌에 경적(經籍)들을 두루 읽어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다.


 


(※ 아마도 진서 지리지에 나오는 기주 안평국 관진(觀津)현을 말하는 듯합니다.「위서」지형지에 따르면 ‘기주 무읍군(武邑郡) 관진(灌津)현’인데, 전한 때는 신도(信都)에 속하고 후한 및 진나라 때는 안평(安平)에 속했었다고 고증함.)


 


영가(永嘉: 진 회제 307-313년)의 난 때에 요동(遼東)으로 피난하였다가 모용외(慕容廆)가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자(崔毖)를 몰아낸 뒤에는 다시 창려(昌黎)로 옮겼다. (모용외가) 그를 불러서 만나보고는 가상히 여겨 참군사(參軍事)로 임명했다.


 


함화(咸 和: 동진 성제 326-334년) 연간에 송해(宋該) 등이 ‘모용외가 한쪽 구석에서 공을 세우고 왕실을 위해 근성(勤誠,부지런히 정성을 다함)하였는데 그 지위는 낮고 임무는 막중하여 화(華)와 이(夷)(한족과 비한족)를 진수하기에 충분치 않으니 의당 (건업에) 표문을 올려 대장군(大將軍), 연왕(燕王)의 호칭을 내리도록 청해야 한다,’라고 건의하였다. 모용외가 이를 접수하고는 뭇 신료들에게 명하여 널리 이를 의논하도록 하니 모두 송해의 건의대로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한항이 이를 반박하며 말했다,


 


“뭇호(胡)들이 빈틈을 타서 사람들이 해를 입으니 제하(諸夏,중국)가 쓸쓸해지고 다시 강기(綱紀,기강)에 없게 되었습니다. 명공(明公)(→모용외)께서 충무독성(忠 武篤誠,충성스럽고 용맹하고 돈독하고 성실함)하며 사직(社稷)을 위해 근심하며 부지런히 애쓰시어,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 가운데에서도 항절(抗節,절조를 지킴)하고 만리 바깥에서 공을 세우셨으니, 예로부터 근왕(勤王)하는 의리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무릇 공을 세우는 자는 신의(信義)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뿐 명위(名位)가 높지 않음을 근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환공과 진문공은 (천하를) 영복(寧復,안녕되게 회복시킴), 일광(一匡,바로잡음)하는 공이 있었음에도 또한 먼저 예명(禮命,예적禮籍과 책명策命. 여기서는 예법에 따른 관작의 승진 임명을 뜻하는 듯)을 요구함으로써 제후들에게 호령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의당 갑병(甲兵)을 수선하고 기회(機會)를 기다려 뭇 흉악한 이들을 제거하고 사해(四海)를 평정해야 하니, 그러한 공이 이루어진 뒤에 구석(九錫)(과 같은 예우)는 저절로 주어질 것입니다. 게다가 임금에게 총작(寵爵,은혜로운 높은 작위)을 요구하는 것은 신하로서의 의(義)가 아닙니다.”


 


모용외가 이를 불평(不平)히 여겨 밖으로 내보내 신창령(新昌令)으로 삼았다.


 


[334년에] 모용황(慕容皝)이 진군(鎭軍)(대장군)이 되자 다시 참군사(參軍事)로 삼고 (뒤에) 영구태수(營丘太守)로 올리니 정화(政化,정치와 교화)가 크게 잘 행해졌다.


 


[349년에] 모용준(慕容儁)이 대장군(大將軍)이 되자 그를 불러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삼고 양렬장군(揚烈將軍)의 직위를 더했다.


 


[352년에] 모용준이 참람되이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 장차 오행(五行)의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연나라가 오행설의 木火土金水 중 어떤 德을 취할지) 뭇 의논들이 분분하였다. 한항은 당시 병에 걸려 용성(龍城)에 있었는데 모용준이 한항을 불러 결정하도록 하였다. 한항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뭇 신하들이 연(燕)은 의당 진(晉)을 뒤이어 수덕(水德)으로 해야 한다고 의논하였다. 그 얼마뒤 한항이 도착하여 모용준에게 말했다,


 


“조(趙)가 중원을 차지한 것은 오로지 인사(人事)만은 아니고 천명(天命)입니다. 하늘이 준 것을 사람이 빼앗는 것은 신의 소견으로는 불가한 일입니다. 게다가 대연(大燕)의 왕적(王迹,왕업)이 (팔괘八卦의) 진(震) 방위에서 시작하였고「역易」(→주역)에서는 진(震)을 청룡(靑龍)이라 하였습니다. 천명을 처음 받을 때에 도읍성(都邑城)에서 용(龍)이 보였으며 용이 바로 목덕(木德)이니 서로 잘 부합하는 징조인 것입니다.” (※)


 


모용준이 처음에는 비록 (이미 水德으로 정한 것을) 고치기 어려웠으나 뒤에는 결국 한항의 의견을 따랐다. 모용준의 비서감(祕書監)인 청하(淸河) 사람 섭웅(聶熊)이 한항의 말을 듣고는 찬탄하며 말했다,


 


“’군자(君子)가 없다면 나라가 무슨 수로 흥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더니 바로 한영군(韓令君)(→令君은 대신大臣에 대한 존칭이고 여기서는 한항을 가리킴)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뒤에 이산(李産)과 더불어 동궁(東宮,태자)의 부(傅,스승)가 되었는데 태자 모용엽(慕容曄)을 뒤따라 입조하자 모용준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길, “이 두 부(傅)(→한항과 이산)는 일대(一代)의 위인(偉人)이니 쉽게 바꿀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모용준으로부터) 존중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오행상생설에 따라 한漢나라는 火, 위魏나라는 土, 진晉나라는 金을 칭하였습니다.(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그리고 석륵의 조趙나라가 진나라(서진)를 대신했다 하여 水를 칭했는데, 연나라가 이 조나라 뒤를 이었다고 보아 木德을 칭할 것인지(한항의 의견), 아니면 조나라를 가짜 황제로 보아 완전히 배제한 채 晉을 뒤이어 水德를 칭할 것인지의 의견대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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